[이달의 책 95] 눈 NEIGE
[이달의 책 95] 눈 NEIGE
  • 서영민 기자
  • 승인 2019.09.30 15:20
  • 조회수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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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NEIGE


막상스 페르민 소설, 임선기 옮김, 난다 펴냄

시와 소설은 서로 다름을 갖고 있다. 시는 언어를 압축하는 경향이 있고, 소설은 언어를 풀어내는 경향이 있다. 시를 닮은 삶이 있고 소설을 닮은 삶이 있다. 소설 <눈>은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시로 채워졌다. 시를 닮은 소설이라고나 할까? 시인이 되기를 꿈꾸고 하얀 눈을 테마로 시를 쓰는 유코, 프랑스인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며 줄을 타는 곡예사 네에주(프랑스 어로 눈을 뜻함),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해서 시인이 되고 음악가가 되고 서예가 무용수 화가가 되는 소세키 그는 결국엔 예술혼을 불태우다 실명하고 만다. 네에주와 소세키를 닮은 혼혈의 딸 봄눈송이…. 인연은 얽히고 설켜 유코와 봄눈송이는 사랑에 빠진다. 여름날 은빛 강가에서 그들은 혼인했다. 사랑은 운명일까? 모를 일이다. 소설처럼 끝까지 읽고 되돌아 와서 읽어볼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니까.


                                                    서영민 홍보국장 yms@kocoa.org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p11
▶▶ 시간의 흐름은 파란 하늘이 드높게 펼쳐지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함마저 느껴지지만 여전히 한 낮의 태양은 따갑다. 과일과 곡식이 영글기에 좋은 날씨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 오십 지천명(智天命) 하고도 몇 년을 더 살았지만 시간의 흐름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대낮 같은 만월의 밤. 솜처럼 부푼 구름 군단이 하늘을 가리러 왔다. 하늘을 장악하려는 수천의 백색 무사. 눈의 군대였다. p18
▶▶ 구름 군단, 백색 무사. 소설의 언어보다 시적 언어로 다가온다. 눈은 소리없이 강하게 엄청난 무게로 쌓아올린다. 지상에 포근하고 부드럽게 내려앉지만 또 모든 것을 묻어버린다. 맨살에 화살처럼 박히는 세찬 빗줄기처럼 따갑지는 않다.

“알아야 하네. 시는 영혼의 회화이고 춤이고 음악이며 서예이기 때문일세. 시 한 편은 그림 한 폭. 춤 한 편. 음악 한 곡이며 아름다움에 대한 글쓰기이기 때문일세. 대가가 되려면 절대적 예술가의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네. 자네 작품들은 놀랍도록 작품들 속에 춤도 있고 음악도 있지. 눈처럼 희네. 그런데 색이 없네. p38
▶▶ 이런 시인도 있겠지만 시를 빌어 언어유희로 가장된 순수로 포장하는 시인도 있다. 시인도 시인 나름이다. 언제부터인가 의식주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하찮은 일로 여기는 천박함에 물들어 버렸다.

마음속 태양을 향해 가는 여행이었다. 태양의 순수함과 세계의 순수함이 보이는 길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그는 순수하고 반짝이는 기쁨을 느꼈다. 자유롭고 행복했다. 짐이라곤 사랑과 시에 대한 신앙의 금金이 담긴 가방뿐이었다. p41
▶▶ 태양이 순수할까? 태양은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를 제공하지만 때로는 이글거리면서 혹독하게 불태워버리고, 자외선이라는 완벽하게 감춘 무기를 갖고 있다. 자유로움이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무기력으로 발목을 붙잡고 스스로를 방탕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그것은 여자였다. 바위 아래 누울 때 그녀가 보였다. 꿈처럼 부서질 듯했다. 금발의 유럽 사람 같은 젊은 여자였다. 얼음 속 1미터쯤 아래서 잠들어 있었다. p43
▶▶ 유코가 네에주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네에주는 줄을 타다가 추락해 크레바스 얼음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굉장히 비현실적 설정임에도 시리도록 아름답게 다가온다.

사랑이란 가장 어려운 예술이기 때문이지. 글을 쓰는  것, 춤을 추는 것, 작곡을 하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은 모두 사랑하는 것이네. 그것들은 줄타기와 같네. 가장 어려운 건 떨어지지 않고 걷는 것일세. p61
▶▶ 사랑이라는 줄타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균형을 잡아야 된다. 네에주처럼 자신은 균형을 잘 잡아도 줄에 문제가 있으면 추락하고 만다. 그래서 줄타기는 사랑은 어렵다. 세월이 흐르면 동아줄 같던 줄이 가늘어질 수도 있고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지탱하는 힘이 버거울 수도 있다.  

그녀의 생은, 삶의 평범함과 우연의 비범함이 엮고 푸는 마디들이 있는 구불구불한 줄처럼 나아갔다. 그녀의 예술은, 일직선의 팽팽한 줄 위에서 위험 속에서 섬세하게 나아가는 것이었다. 예술에서 그녀는 독보적이었다. p73
▶▶ 지구상 인간 이외에 생명체들이 예술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만큼 예술행위는 인간만이 갖는 독특한 삶의 방식이다. 나의 감성이 도덕적 섬세함을 갖지 못해서 불러온 결과들을 자책해보기도 한다. 네에주처럼 섬세하게 나아가지 못했다.

겨울이 왔다. 그리고 봄이 왔다. 아이는 빛의 황홀 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네에주는 행복했다. 한 손에는 소세키의 사랑을 들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아이에게 주는 자신의 사랑을 들고 있었다. 그 깨지기 쉬운 평행봉은 행복의 선 위에서 균형을 잡는데 충분했다. p80
▶▶ 네에주의 양손엔 소중한 사랑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행복에 안주할 수 없었다. 양손을 지탱하는 자신의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에주는 줄 위에서 훨훨 날고 싶었다. 땅에 내려오면 양손에 쥔 사랑으로 행복했지만 줄 위를 날고 싶어서 위를 쳐다볼 수밖에 없는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네에주의 삶이었다.

영혼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정한  빛과 진정한 색들에 영원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으셨네. p92
▶▶ 빛은 곧 색이다. 빛이 없으면 색은 드러날 수 없다. 어둠의 색은 없다. 눈은 자신은 색이 없지만 하얀 도화지처럼 다른 색을 돋보이게 한다. 하얀색만 눈 속에 묻혀버린다. 그래서 하얀색은 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스승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니었다. p103
▶▶ 방황하고 힘들 때 바람에 흔들리는 전선줄을 붙잡아주는 전봇대처럼 꽉 붙들어 줄 스승이 있었던가? 스승의 한마디면 됐다.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니?”

태어나, 연기하다, 죽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들이 있다. p122
▶▶ 타인을 위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연기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어떠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줄을 타면서 어떤 가치들을 손에 쥐면서 삶의 균형을 잡을지 생각해본다.

이 시적인 소설은 유코와 소세키, 봄 눈송이와 네에주의 이야기이다. 나비 날개처럼 겹치는. p126
▶▶ 이 소설은 빨리 읽히지만 읽히는 시간보다 잔상으로 남는 활자들의 시간이 훨씬 길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예술을 하고, 누군가는 늙어 간다. 삶이라는 줄을 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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