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리뷰] 해피엔드
[시네마 리뷰] 해피엔드
  • 미용회보
  • 승인 2019.08.05 10:16
  • 조회수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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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에게 영화는 예술이 아니다. 미학적 관심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로서의 관심이 더 크다는 점에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식적 고민에 방점을 찍는다.
특히 미디어에 관한 관심은 초기 영화부터 이어져 왔다. 비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최근의 미디어인 휴대폰과 CCTV에 이르기까지 미디어의 발전 양상과 괘를 같이 해왔다. 당대의 미디어가 현대사회에 미치는 소외현상을 서사 양식에 얹어 냉정하게 전달하는데 무게를 싣고 있다. 이를 통해 일상적 폭력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해왔다.
하네케 감독의 영화가 불편한 것은 영화 속 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끊임없이 관객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혹은 당신은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의 방식이다.

스마트폰, CCTV라는 두 개의 시선

영화 <해피엔드>도 미디어 매체인 휴대폰 동영상과 CCTV, 인터넷 채팅 창 등의 미디어를 주요 장치로 활용하면서 3대가 모여 사는 한 가족의 서사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 활용된 미디어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벗어날 수 없는, 혹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반영한다.
<해피엔드>는 스마트폰 동영상 숏으로 열고 닫는다. 첫 장면은 13살 소녀 에브가 엄마의 일상을 스마트폰으로 생중계하는 영상이다. 이미 루틴한 행동을 반복하듯 에브의 멘트는 엄마의 행동보다 앞서 나온다.

이어지는 영상은 역시 스마트폰으로 생중계하는 영상이다. 엄마의 우울증 약을 먹인 햄스터가 죽어가는 과정이다. 두 장면을 연결시킨 것은 에브에게 엄마와 햄스터가 동일한 대상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란 점이다. 에브의 캐릭터는 알려졌다시피 일본의 한 14살 소녀가 엄마에게 약을 먹인 후 죽어가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온라인에 올린 충격적인 실화에서 가져왔다.
스마트폰 화면에 이어 CCTV 영상이 나온다. 공사현장(조르주 로랑 집안의 장녀 안느가 CEO로 있는 건설회사의 현장)을 관찰하고 있는 화면이다. 무심하게 흘러가던 화면은 한쪽 축대가 무너져 내리는 장면까지 보여준 후 멈춘다.

<해피엔드>가 스마트폰의 창과 CCTV의 시선을 연결시키며 영화의 문을 열고 있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압축한다. 소통이 단절되고 붕괴되고 있는 세계라는 비관이다. 붕괴되고 있지만 CCTV처럼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인식이다. 그렇게 붕괴되고 있는데, 죽어가고 있는데 개인의 시선(스마트폰)이나 사회적 시선(CCTV)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질문일 수도 있다.
스마트폰과 CCTV라는 미디어를 전면에 배치한 후 영화는 각 인물들의 서사를 배치하며 붕괴의 조짐을 조각조각 맞추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해피엔드>는 프랑스 북부의 칼레에서 건설회사로 일가를 이룬 조르주 로랑과 그의 자녀, 손주까지 3대가 모인 부르주아 일가의 이야기가 중심 서사다. 그렇지만 서사를 이끄는 중심인물이 없다. 조르주와 장녀 안느, 외과의사인 아들 토마스, 손주인 피에르와 에브 등 각 인물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서사를 이룬다. 여기에 안느의 애인인 로렌스와 토마스의 아내 아나이스, 불륜 상대인 클레르도 서사의 조각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또 이들 부르조아 집안의 일을 돌보는 집사 라시드와 그의 아내 자밀라를 배치해 소통이 불가능한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에브가 조르주 집안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보다 안느가 건설현장 붕괴 사고에 대응하는 장면을 앞에 놨다. 어떤 동요도 없이 냉정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안느는 애인 로렌스에게 가던 길이다. 로렌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 뉴스를 무심히 응시하며 전화를 받는 태도에서다. 이들은 사고에서 누가 다쳤는지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단지 귀찮은 일이 발생했다는 식의 대응이다. 분명 사고가 있었고 사고의 당사자는 노동자일 것이다. 힘없는 자, 가난을 대하는 태도를 압축하는 셈이다.

에브의 엄마는 약물과다 복용으로 병원에 실려 갔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에브나 남편이었던 토마스가 슬퍼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에브가 살던 집을 보러온 부동산업자가 등장한 것으로 유추할 뿐이다.
영화 <해피엔드>는 생략된 것이 많다. 장면과 장면 사이를 잇는 맥락을 봐야하는 영화다. 사고에 대응하는 안느의 태도와 한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에브나 토마스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연민이 없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칼레로 대표되는 유럽 사회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칼레는 3년 전 프랑스 정부의 난민촌 철거와 더불어 여러 가지 난민 문제들로 끊임없이 화제가 돼온 곳이다. 영국과 이어지는 도버해협을 건너는 해저터널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세계 바깥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

조르주 집안 사람들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예의바른 것처럼 보인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정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비즈니스 관계로 맺어진 안느와 로렌스의 위선이나 노골적인 채팅으로 확인되는 토마스의 이중성 등 이들이 지닌 우아함 이면의 어두운 면도 드러낸다.
이들은 자기 세계에서만 존재한다. 바깥에 놓인 노동자, 이민자의 비극에는 관심이 없다. 두 계급간 거리는 두 번 등장하는 롱테이크로 확인된다. 첫 번째 롱테이크는 안느의 아들 피에르가 사고수습을 위해 유족을 만나는 장면이다. 피에르는 유족과 대화를 나누다 심하게 얻어맞는다. 이때 카메라는 멀리 있어서 피에르가 어떤 말을 했기에 얻어맞았는지 알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찍힌 두 번째 롱테이크는 자살에 실패한 조르주가 휠체어를 타고 길거리를 이동하는 장면이다. 조르주는 지나가던 흑인에게 뭔가 얘기하지만(시계까지 풀어주면서) 자동차 소리 때문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두 장면에서 피에르와 조르주가 어떤 말을 건넸는지는 뒷받침되는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다. 피에르의 경우 엄마 안느가 그를 찾아간 장면에서 사고 수습 과정에서 건넨 말이 화근이 됐다는 것이 확인된다. 조르주는 뒷 장면에서 이발사에게 총을 구해 달라는 내용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반면 대화 상대의 목소리는 알 수 없다. 사고 노동자, 난민으로 추정되는 흑인 등은 가난한자의 표상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너무 멀리 있어 들리지 않는다. 이 계급간 거리감을 롱테이크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하네케 감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난민과 인종 차별 문제까지 건드린다. 조르주의 생일 파티에서 피에르는 모로코 요리를 나르는 자밀라를 요리 솜씨가 뛰어난 노예로 지칭한다. 또 엄마 안느의 약혼 파티에서는 난민들을 초대해 분위기를 망친다. 엄마에게 비즈니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피에르의 분풀이다. 이 분풀이가 인종혐오로 나타난 셈이다. 혐오는 아래로 향한다. 자신보다 못한, 힘없는 자를 향한 혐오다.
어쩌면 약혼식장은 유럽사회를 축약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아하게 파티를 즐기는 부르주아 계급과 라시드와 자밀라로 대표되는 이민자, 피에르가 불러온 난민, 가족에 속해 있지만 바깥에 놓인 불안함에 시달리는 에브와 피에르 등 각각의 계급과 계층이 공존할 수 있겠는가 질문하는 셈이다.

조르주는 에브에게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부탁하고 어수선한 약혼식장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바닷가로 밀어달라고 한다(조르주와 에브는 각각 아내와 엄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고 자살시도 경험도 공통점이다). 에브는 망설임 없이 바닷가 쪽으로 휠체어를 밀어넣고 뒤로 물러난다. 에브는 뒤로 물러서서 그 장면을 촬영한다.
<해피엔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갑게 바라보는 영화다.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현재 유럽사회가 처한 현실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의 불편함은 그 자리에 관객인 우리가 불려 들어간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신대욱

현 주간신문 CMN 편집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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