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리뷰] 러브리스
[시네마 리뷰] 러브리스
  • 미용회보
  • 승인 2019.05.30 16:11
  • 조회수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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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앞을 향한 시선은 가능한가?

 

*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숲이 있다. 눈 덮인 숲이 있다. 숲길을 따라 강이 나 있고, 나무들이 강가를 따라 이어진다. 빈 공간을 채우는 새소리. 물오리들이 강을 따라 이동한다. 숲 뒤편으로 아파트 숲이 살짝 보인다. 이 숲은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이어지며, 어떤 이들에겐 이 길을 지나간 누군가를 기억하게 만드는 장소가 된다.

영화 <러브리스>의 도입부는 이 숲길을 몇 개의 숏으로 나눠 보여주며 시작한다. 눈 덮인 숲길과 차가운 시선이 결합하며 전체 영화를 이끄는 서늘한 정서를 전한다. 이 길은 지금은 사라진 아이가 학교와 집을 오가던 길이다. 끝내 찾지 못한 아이가 다니던 길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것은 사라진 존재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사라진 것, 혹은 잃어버린 것을 안고 다시 살아가는 일. 아니면 한순간에 삶을 바꿔버린 비극적인 사건에서 빠져나오려는 무력함을 보여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숲길 다음에 이어지는 시퀀스는 하굣길이다. 카메라는 학교 정문 앞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오는 아이들을 맞이한다. 뛰어나오는 아이들과 달리 알로샤는 느리게 걸으며 한 친구(아마도 유일한 친구인 듯)와 작별인사를 한 후 홀로 천천히 숲길로 이동한다. 그만큼 알로샤는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어하는 아이로 그려졌다. 홀로 숲길을 걷던 알로샤는 길에서 출입금지를 알리는 역할을 했을 테이프를 주워 나뭇가지에 묶고 돌리다 나무 위로 던져 올린다(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연결된다).
알로샤가 포함된 외부의 길은 이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실종 이후 알로샤가 이동했을 법한 길을 수색팀의 행적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존재하지 않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것처럼 외부의 길들은 그렇게 비칠 뿐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응시하기

알로샤가 갑자기 종적을 감춘 이유를 관객들은 안다. 자신을 짐으로 여기는 사실을 알게 된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모들은 알로샤의 실종 이유를 모른다. 알로샤의 실종 이후 다뤄지는 알로샤에 대한 정보도 빈약하다. 그만큼 부모는 무관심으로 알로샤를 제대로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알로샤의 부모인 보리스와 제냐는 이혼을 앞두고 다툰다. 이들은 각자의 연인과 새 출발을 하고 싶어한다. 그 사이에 낀 알로샤는 서로에게 짐일 뿐이다. 서로에게 알로샤를 떠넘기려 하며 감정이 격해진다. 보리스가 다니는 직장은 이혼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그리스 정교회 교리에 충실한 곳이다. 그에게 알로샤는 직장 문제와도 연관돼 있다. 이혼하더라도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알로샤가 없어야 한다. 제냐는 원치 않은 임신으로 보리스와 결혼하게 된 것을 후회한다. 그만큼 무심하게, 어쩔 수 없이 알로샤를 대했다.
알로샤가 자신이 부모에게 짐이 된 사실을 알게 된 장면은 직접적이다. 알로샤는 보리스와 제냐가 자신을 서로 떠넘기려 다투고 있는 상황을 욕실 문 뒤에서 듣고 숨죽여 오열한다. 다음날 아침, 밥을 넘길 수 없는 알로샤의 눈물을 보여주지만 역시 제냐는 알아채지 못한다. 이후 서둘러 집을 뛰쳐나가는 장면까지 카메라는 자세히 보여준다.

영화는 알로샤가 실종된 이후 더 이상 알로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러브리스>는 초반부 아이의 실종 이후 대부분을 아이를 찾는 과정으로 채운다. 고향집과 숲길, 학교, 폐건물, 병원 등에 이르기까지 알로샤가 없는 공간을 옮겨 다니며 그의 부재를 채우고 있는 셈이다. 사라진 알로샤는 건물 외벽의 실종 전단지로만 보여질 뿐이다.

영화 <러브리스>는 아이의 실종으로부터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돌아보게 만들며,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지 묻는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서 인물을 다루고 있으며, 아이에서 가족, 가족에서 사회 전체를 돌아보게 만드는 확장성을 갖추고 있다. 제냐와 제냐의 엄마나 보리스의 새 여자 친구인 마샤와 마샤의 엄마 등의 관계가 그렇다. 영화 중간 중간 라디오나 TV를 통해 나타나는 러시아 정치 상황이나 종말론 등의 에피소드가 배경으로 쓰인 것도 그런 확장의 단면이다.

 

 

사랑을 흉내내기만 하는 이기적 싸움

창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장치다. 그렇지만 영화 <러브리스>에서 다루는 창은 외부와 단절된, 인물들간 단절된 벽으로서 기능한다. 혹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한 사회적 시선일 수도 있다.
영화 도입부 알로샤가 학교에서 돌아와 밖을 내다볼 때의 창은 바깥 풍경(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과 단절된 그의 처지를 나타낸다. 제냐는 남편 보리스와 대화할 때나, 아이와 대화할 때, 새 연인인 안톤과 데이트할 때도 휴대폰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휴대폰의 창도 단절의 역할을 한다.

영화 <러브리스>를 연출한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감독은 메이킹 필름을 통해서 “우린 타인을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사랑을 흉내내고,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거짓말을 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감독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싸움이 지속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인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완벽한 사랑에 영영 닿을 수 없으리란 것.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싸움, 어쩌면 우리 삶은 전부 그것들로 채워지리란 비관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아이가 영영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3년 후의 시점이다. 제냐와 보리스는 각각의 연인과 새 삶을 꾸려가고 있다. 큰 사건을 겪었지만 이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사랑은 여전히 흉내에 머물고 있고, 무료함에 지쳐 있다. 보리스는 마샤와 낳은 아이를 돌보고 있지만 TV 시청을 방해하는 아이가 귀찮기만 하다. 제냐도 보리스와 함께 있지만 서로 대화는 없고 자신의 휴대폰만 보고 있다. 무료해진 제냐는 베란다 밖으로 나가 운동기구로 달린다. 달리는 제냐는 ‘러시아’라 쓰인 운동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속도를 줄인 제냐의 정면 클로즈업을 보여준 후 3년 전 붙인 알로샤의 실종 전단지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어 알로샤가 다녔던 숲길로 향한다. 텅 빈 공간이 돼버린 숲길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무심하게 알로샤가 던져 올린 나뭇가지의 테이프를 보여준다. 사건 이후, 그 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시도는 무력함 그 자체다. 어딘가로 달리고자 하지만 앞은 여전히 알 수 없고, 시선은 부재에 머물러 있다. 개인의 서사이든 러시아 전체에 대한 은유이든 마찬가지다. 사랑이 사라진 시대는 그만큼 암울하다. 반대로 다시 처음의 자리에서 사라진 것, 잃어버린 것을 응시해야만 앞을 향할 수 있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신대욱

현 주간신문 CMN 편집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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